좋은시

첫눈 오는 날 만나자

실크리버 2011. 1. 25. 19:19



    ♣ 첫눈 오는날 만나자 ♣
    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詩: 안도현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 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?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

         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. 
          
         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.
         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.
         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
         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.
         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
         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.
         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.
         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.
         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
         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.
         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
         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.
         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
         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 군밤장수한테 다가가
         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.
         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.
         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.
         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
         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

       

                     글 / 정호승 / 첫눈 오는 날 만나자中에서